0113 화요일, 15일 차. 엘 부르고 라네로(El Brugo Ranero)에서 레온(Leon)까지
이동 거리 38.5km 소요 시간 9시간.
0114 수요일 16일 차. 히온(Gijon) 방문, 레온(Leon) 휴식
알베르게에는 순례자도 없고, 주인과는 왓츠앱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혼자 세요를 찍는다. 샤워실도, 화장실도 문을 닫지 않아도 되고, 분실 위험도 없다. 허기를 채울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10분을 돌아가서 주유소에서 빵과 물을 사고, 고이 간직했던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숙소에 난방이 없다. 통나무 장작에 불을 붙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뿌듯한 일인지 알았다. 혼자서 알베르게를 독차지하는 일은 낯선 감정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안락하면사도, 불안한 잠을 취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15일 차를 출발한다. 10분을 걸었을 때 도네이션을 깜빡 잊고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돌아가는 길은 나무 타는 냄새와 소리 그리고 온기를 기억하는 나의 자선을 잊었다는 자책.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려고 맘을 쏟는다.










레온으로 가는 마지막 메세타 구간. 비 오는 날엔 자작나무 숲길로 들어서라. 자작나무는 캄캄한 밤길에서도 스스로 빛을 낸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상처를 보듬고 사는 법. 봄이 오면 가장 먼저 싹을 틔우는 위로의 숲을 걷는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자가 되어 주는 일이다. 길을 걷는 누군가를 위해 의자를 내어주는 곳.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하염없이 지평선을 본다. 살면서 이렇게 지평선 풍경에 젖었던 적이 있었던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한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새벽, 아스팔트 정중앙을 걷는다. 그날을 추억한다는 것은 새벽에 지평선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오는지 아는 것.










꿈에 그리던 메세타, 도로와 이어진 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 아침을 먹을 데가 없어서 굶고 출발했는데 거의 20킬로미터를 걷고 나서야 드디어 열린 바를 만난다. 맥주 한 모금은 힘든 노동을 끝낸 잠깐의 휴식, 들밥을 펼쳐놓고, 탁배기 한 잔을 들이키며 삭신의 고통을 털어내는 처방과 같다.
스페인의 삶이 느껴진다. 스페인 사람들은 흰색 차를 좋아하고, 붉은 지붕 벽돌집에 살면서, 파란 다리 난간을 만든다. 횡단보도에 서면 차는 멈춘다. 마을은 산과 들에 신기루처럼 떠있다. 성당 첨탑 아래 모여 살고, 성당 종소리를 들으며 산다는 것을 생각한다. 바(Bar)에 들른 스페인 사람들은 축제를 하듯 시끌벅적한데,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인기척이 없다.
순례길을 알리는 대부분의 파란 표지판은 "까스티야 이" 글자가 검정 스프레이로 훼손되어 있다. 우리는 까스티야가 아니라, 단지 레온이라는 주장. 내 삶에 애써 지우려고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지운다고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각인처럼 새겨진 감정을 무엇으로 지울 수 있을까. 누군가에 속한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감내한다는 것. 진정한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전부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을 마주하는 일이다.
비 내리는 날 송전탑 아래는 전기가 흐르는 소리가 난다. 툭툭 빗방울처럼 떨어질 것만 같다. 비 내리는 들판을 걷는다는 것은 귓가에 속삭이는 빗소리와 살며시 뒤에서 밀어주는 비의 고마움을 안다는 것. 살면서 처음 해 보는 것들이 많다. 매일 무거운 배낭을 메고 미치도록 걷는 것. 다 큰 어른이 콧물을 흘리는 일. 아침에 세수도 안 하고 길을 나서는 일. 난 평생 겪을 비와 바람을 순례길에서 실컷 만났다.







길 위에는 수많은 유혹이 도사린다. 레온으로 가는 길에서 몇 번이라도 택시를 잡아타고 싶었다. 때로는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가도 홀리듯 길을 잃는다. 뿌엔떼 비야렌떼(Puente Villarente)에서 길을 잃었다. 길을 찾아 한 시간 가량을 헤매고, 진흙밭을 통과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유혹이 도사리는 노란 화살표와 길이 아닌 곳에서 길을 내려던 오만한 용기의 합작품. 비 때문에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볼 수 없었다는 변명은 구차하다. 이상하리만치 내가 헤맸던 시간과 거리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다. 길을 잃었을 때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섣부른 용기에 대한 참회. 고인 빗물에 신발에 달라붙은 진흙을 씻어낸다. 물길을 피하지 않는다. 신발은 신사의 품격이다. 설령 길을 잃었다 해도, 나의 품격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애증의 노란 화살표를 다시 만났다. 진흙탕을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굴다리에서 나는 비를 피한 것이 아니라 한 사내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심판의 기둥에 죄인을 묶고 벌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무사히 네온에 도착했다. 레온에서 온전히 하루를 쉬기로 했다. 길 잃은 영혼을 위한 위로. 나는 또 언제 우산도 없이, 진흙밭을 뒹굴게 될까.





레온의 알베르게에서 한국인 체육 선생님 한 분과 군대를 전역한 후 취업을 준비하다가 순례길에 오른 청년과 만났다. 공군 장교 식당에서 취사병으로 근무했던 그가 요리한 파스타를 나누며 오늘의 기억을 저장한다.










네 번째 순례길을 걷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추로스 맛집도 들르고, 오늘 밤 묵을 알베르게에 짐을 맡기고, 바닷가 마을 히온(Gijon)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산과 들을 걷다가 바다를 만나는 호사. 배낭의 짐을 벗은 것만으로도 들떴다. 버스에 몸을 싣는 묘한 흥분. 순례길을 벗어나 처음 히온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메뉴 델 디아(Menú del día), 전채(Primero), 메인 요리(Segundo), 디저트(Postre)로 구성되는 오늘의 정식. 와인 한 잔에 풀어지듯 나는 말랑말랑해졌다. 따뜻한 해산물 수프와 병아리콩과 해산물을 함께 끓여낸 가르반소스 콘 마리스코(Garbanzos con Marisco) 그리고 스페인의 전통 요리인 라보 데 토로(Rabo de toro)를 맘껏 탐닉한다.










나는 나에게 쉴 수 있는 용기를 선물한다. 스페인의 바닷가를 하염없이 걸었고, 훌훌 털어냈다. 사진을 찍다가 마주친 쌍둥이처럼 비와 유혹 그리고 용기는 서로 닮았다. 따뜻하다가도 거침없고, 달콤하고도 아릿하다. 7시간의 외도. 다시 레온으로 돌아가는 길, 스페인의 북쪽 산악 구간 칸타브리아 산맥(Cantabrian Mountains), 눈 덮인 산을 가로지를 때 귀가 먹먹해졌다. 뜻밖의 선물도 비처럼, 유혹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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