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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순간/산티아고 순례

산티아고 순례길, 내 삶의 돌연변이.

by JOY's Story 2026. 1. 8.

9일 차 벨로라도(Belorado)에서 아타푸에타카(Atapuerca)
이동 거리 30.27km, 소요 시간 5시간 45분.

아침에 면도를 하지 않는 희열. 벌거숭이처럼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길을 나선다는 것이 싱그럽다. 아침마다 신발끈은 묶는 의식, 전쟁터에라도 나가는 것처럼 무겁고 장엄하다. 그날에 대한 기도를 풀리지 않도록 굳게 묶는지도 모른다.


새벽부터 환한 불을 밝히고, 거대한 기계를 끌고, 언덕 밭을 가는 농부의 마음과 길을 나서는 순례자의 마음은 같은 것일까. 여행이 일상이 되고 일상이 여행이 되는 시대. 농부의 마음은 여행이 되고, 순례자의 마음은 일상인 것일까. 산티아고 순례길이 그토록 잊히지 않고,  그리움으로 남는 것은 매달렸던 시간 때문일 것이다. 순간들을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뜨고, 달이 진다. 탄생과 소멸, 시작과 끝을 마주하는 경이로운 순간은 하루가 주는 선물일 것이다. 하루를 마치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삶에 대한 경외. 새로운 시작을 위한 다짐과 희망을 꿈꾸는 매일의 기적이다. 어둠을 걷어내고, 희망이 솟구치는 아침을 맞는 희열. 지는 해를 바라보며 먼저 손을 내미는 오늘에 대한 화해. 아픔도, 욕심도, 모두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이다. 순례자들은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걷고, 먹고, 사랑하는 단순함 속에서 산다. 길에서 만나는 풍경은 흐트러짐 없이 오롯이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기에 더 감동적이다.

거리를 이동하는 일정상 조금이라도 일찍 숙소에 도착하려는 계산 때문이다. 잠도 덜 깬 새벽길을 걷다가, 문득 별이 쏟아지는 풍경에 전율한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주는 선물. 특히 겨울철에는 어스름한 달빛 아래 하얗게 서리 내려앉은 들판을 걷다가, 순례자들은 세상이 온통 벌겋게 달아오르는 황홀한 순간을 맞는다. 그토록 따뜻하고, 포근한 색감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매일 해 뜨는 순간을 보고 산 적이 있었던가. 순례길에서 맞는 일출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태양의 춤사위로 남는다.

걸음을 멈추고,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볼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드는 아침 풍경을 잊을 수 없다. 길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자화상이었다. 신이 만든 자연이 초라한 내 모습을 한없이 따뜻하게 품어주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보고, 듣고, 냄새를 기억하는 생생한 기억이다. 살갗을 스치거나 손 내밀어 만졌던 감촉이다. 그리움의 냄새였고, 입안을 맴도는 달콤함이었다. 순례자에게 일출과 일몰은 나를 마주하는 황홀한 기억이다.


투박한 지붕의 선과 돌담의 결, 섬세한 색깔과 문양을 그대로 박제하고 있는 곳. 역사를 간직하고,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살면서 한 번도 양치기 개가 양 떼를 모는 드넓은 목장, 워낭 소리를 울리며 걷는 대장의 뒤를 따르는 소 떼를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스팔트나 흙길이 아닌 자갈이 깔린 돌길을 걸어본 적이 없는 문외한의 여행이라서일까. 길 위에서 만나는 감동이 크게 와닿는다.
 
천년 세월을 견디고 있는 다리를 건너고, 낡고, 부서진 성곽의 담벼락을 만져보자. 좁은 골목길에서 한참을 멈춰서 하늘을 한번 쳐다보자. 역사를 지키고 산다는 것은 빠르게 돌아가는 쳇바퀴 같은 삶 속에서도 내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는 것, 내가 걸어야 할 길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른다.


순례길을 건너면서 오늘 처음으로 순례자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짤은 순간이었지만 반가움과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한다. 아게스(Ages) 언덕을 넘었을 때, 아타푸에르카(Atapuerca) 마을이 보였다.

아타푸에르카에 도착할 때쯤 흰색 승용차를 세운 스페인 사내와 딸이 부르고스(Burgos)까지 태워주겠다며 차에 타라고 한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마도 새벽부터 길을 나선 내 모습이 춥고, 배고프고, 지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르고스까지 태워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에 나는 몹시 흔들렸다. 유혹에 흔들리는 것은 내가 꿈꾸었던 것을 저버리는 것이다.

호모 안테세서의 발견지, 아타푸에르카 유적지가 있다. 유럽 인류 진화의 메카 또는 초기 인류의 타임캡슐, 유럽의 인류 역사를 바꾼 곳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고, 순례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길을 걸으면서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 든다.. 때로는 인종과 종교, 문화와 언어를 초월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수백만 년 전 인류는 내가 걸었던 이 길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들의 고민과 행복은 지금의 나와 무엇이 달랐을까.

그들은 무엇을 견뎠고, 무엇이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을까. 캄캄한 이 길에서 별빛의 흐름을 따라 걸었을 그들의 눈과 문명의 불빛으로 밝히는 나의 눈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더 나아진 것일까, 아니면 퇴보한 것일까. 순례길을 걷는 내내 무릎의 통증과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는 이유를 묻는다. 나의 진화는 무엇을 퇴화시키고, 무엇에 순응하게 될지. 길에서 마주했던 인연의 온기가 식기 전에, 문득 내 삶에 일어났던 돌연변이가 과연 무엇을 바꾸게 될지 궁금해졌다. 산티아고는 내 삶의 돌연변이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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