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4일 차, 2026년 1월 2일.
팜플로나(Pamplona)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까지. 약 25km, 5시간 소요.
Albergue de los Padres Reparadores 9유로
팜플로나를 빠져나와서 만나는 첫 번째 도시(Cizur Menor)에서 갑자기 스페인 경찰이 경적을 울리며 세웁니다. 혹시 무단횡단을 한 나를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지 당황한 순간, 어디서 출발했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묻고는,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화장실도, 물도, 음식점도 모두 닫았다며 지금 이 도시에서 정비를 하고 출발하라고 합니다. 부엔 까미노! 해피 뉴 이어! 살다 보니 경찰까지 울컥하게 만드는 순례길의 마법이었을까요. 사소한 것에도 감동하며 살았던 적이 있었는지 묻습니다.





모두가 길 위를 걷는 꽃이고, 낡은 의자며, 색 바랜 노란 화살표가 되는 곳. 오늘 나는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이 교차하는 용사의 언덕을 오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프랑스 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지리적 지점을 넘어, 삶의 여정을 축소하고 있는 상징으로써 의미가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이 장소를 걸으면서 자신의 삶이 시가 되고, 인생을 노래하는 특별한 경험을 마주합니다. 등 뒤로 붉게 물드는 아침 하늘,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 꿈꾸듯 뒤척이는 겨울 들판의 냄새, 질퍽거리는 흙길을 취한 듯 걸어보리라. 몸뚱아리 전부를 하얗게 태우며 걸어보리라. 작은 예배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가 용서받기를, 나 또한 용서하기를 기도하리라.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ón, The Hill of Forgiveness)은 프랑스 길에서 빠질 수 없는 장소 중의 하나로 순례자의 내면적 전환점을 상징합니다. 스페인어 “Perdón” “용서”를 뜻하는 단어. 순례자들이 스페인 내륙으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던 곳입니다.
해발 770m 언덕에는 1996년에 세워진 순례자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거센 바람을 맞으며 걷는 순례자들을 형상화한 작품, 길의 영혼(El Espíritu del Camino) 앞에서 순례자들은 사진을 찍습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미야자와 겐지의 문장처럼, 용서가 주는 힘은 신의 숨결로 풍력 발전기를 돌리는 것은 아닐까요. 과거의 상처, 관계 속의 오해, 자신에 대한 죄책감 등을 내려놓고 언덕을 넘은 후에야 비로소 순례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용서란 잊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El perdón no es olvidar, es liberarse.”
순례자에게 용서란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둥켜안고 걸어 나가는 용기. 비로소 순례자의 마음이 되는 순간입니다.
찌푸린 하늘, 바람도 울지 않는 언덕에서 길의 영혼이 되어 뿌연 하늘, 바람도 멈춘 언덕에 서는 상상.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사진도 몇 장 찍지 못하고, 용서도 못하고 허둥지둥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돈키호테의 풍차 같은 풍력 발전기가 보였을 때, 패딩을 입고, 따뜻한 모자를 뒤집어쓰고, 두꺼운 장갑을 껴야만 했습니다. 꽁꽁 언 손으로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할지를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원수와 함께 올라와도 힘든 길을 걸으며, 서로를 의지하고, 용서하게 되는 마법은 없었습니다. 냉소와 관대, 아무도 찾지 않은 용서의 언덕은 용서에 목마른 한 사내를 밀쳐냅니다.










평생 용서를 구하며 살아야 할 것. 누구도 상처를 줄 수 없는 사람으로 살 것. 같은 곳을 향하는 길의 영혼이 되어 보듬고 사는 법을 뚝 던져놓고 주섬주섬 챙겨 가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누구든, 부자든, 가난한 영혼이든, 모두가 순례자가 되는 용서의 언덕을 내려오는 길에서 나는 끊임없이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습니다. 자신을 용서할 용기,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을 용기. 나의 산티아고는 스스로 미워하고, 학대했던 나를 자꾸 괜찮다며 보듬어 줍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울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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