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일 금요일 11일 차, 부르고스(Burgos)에서 까스트로헤리츠(Castrojeriz)까지.
날씨 조금 흐림 그러나 맑음에 가까움. 바람 엄청 심함. 최고 풍속 40km/h.
이동 거리 42km, 소요 시간 9시간
1월 10일 토요일 12일 차, 까스트로헤리츠(Castrojeriz)에서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villarmentero de campos)까지
맑음. 이동 거리 36km, 소요 시간 7시간



누구나 한 사람쯤 가슴에 품고 걷는 길이 순례길이다. 가슴은 타들어가고, 네덜란드에서 온 순례자 로젠을 부르고스에서 집으로 돌아갔다. 부르고스에서는 길을 잘 찾아야 한다. 시골길에 익숙해진 순례자의 눈은 낯선 도시의 풍경에 요동치듯 흔들렸다. 사람도, 차도, 건물도 성난 거인처럼 달려든다.










바람 속을 걷는다는 것은 물결을 일렁이듯 순례자의 마음을 이리저리 흔들어 놓는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윙윙거리는 소리로, 차가운 감촉으로 다가온다. 까스트로헤리츠로 가는 길은 이름 모를 바람이 산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까스트로헤리츠로 가라.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미야자와 겐지의 문장처럼, 바람의 언덕에도 새들은 살고, 풀들은 자란다. 바람을 견디고 사는 일은 심장을 떼어 주는 일이다. 언덕을 오르는 것보다 더 심장이 뛴다. 어쩌면 사랑의 화살은 심장이 뛸 때 날아오는지도 모른다. 바람을 견뎌 온 겨울 들판의 나무는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










겨울 순례길에서 비를 가장 무서워했던 나에게 신은 비를 거두고, 바람을 보냈다. 휘청거리며 바람을 뚫고 간다. 바람을 견디고, 나아온 순례자를 향한 연민. 살면서 가장 무서운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태풍이 몰아쳐도 피할 수 있으면 무서운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휩쓴다 해도, 나는 안전지대에서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강풍주의보에 굳이 길을 나설 이유 없이 살아왔다. 내가 살면서 피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다. 이미 굳고. 마르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들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이제는 똥을 피하지 않는다. 기꺼이 그들의 길에서 배설물처럼 소리 없이 걸어가리라.
아무도 살지 않는, 언덕과 밭이 펼쳐진 곳에 빨간 지붕 외딴집. 산볼(San bol)이라는 동네, 들판에 홀로 나는 새처럼 자유롭던 까스텔라노스 데 까스트로(Castellanos de Castro)라는 마을에 하나뿐인 알베르게가 있다. 좀 더 자세히 찍고 싶어서 나아가다 보니 점점 몸을 숨긴다.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아니었다면 다시 내려갔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들길을 걷는다. 겨울 들판은 들밥처럼 정겹지 않다. 살면서 처음 길바닥에 앉았다가 드러누워버렸다. 해를 등진 안톤 유적지를 바라보면서 귤 한 개를 먹는다. 살면서 이토록 달콤한 귤을 먹었던 적이 있었던가.










까르트로헤리츠, 메세타 고원 언덕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성곽의 흔적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세와 비슷한 환경을 보전하고 있어서 마치 중세의 도시 한 복판에 선 느낌을 받는다. 특히 수도원 유적, 언덕 위의 성터가 인상적인 마을이다. 2023년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네트워크에 선정되었고, 역사적 가치가 높아 순례자와 관광객 모두에게 매력적이다.
언덕 위 성터에 올라 바라보는 마을 풍경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물, 소금, 올리브유로 화덕에 구운 새끼 양 요리를 즐겨보는 것도 좋고, 주변 마을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 양식의 성당 건축물을 관람하는 묘미도 있다. 알베르게 여주인의 먼 길 힘들었겠다며, 추웠겠다며 어깨를 토닥이던 따뜻한 환대. 환갑 기념 여행으로 산티아고 순례길로 온 한국인 교사 부부와의 저녁 식사. 고된 하루는 그렇게 끝이 났다. 숙소에서 만나는 순례자들과 서로의 이름과 나라를 묻고. 각자의 안녕과 부렌 까미노를 응원하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각자의 산티아고 다르기에 서로의 순례길을 응원하는 안녕.










카스트로헤리츠를 떠나는 언덕을 넘으면 거짓말처럼 바람은 잦아든다. 별 헤는 밤과 일출을 보고 싶을 때는 들판으로 가야 한다. 메세타 평원에서는 별과 노래하라, 춤추라. 나는 자면서 사랑을 하고, 걸으면서 사랑을 앓는다. 먹으면서 사랑에 흔들린다. 사랑은 바람처럼 잔혹하고, 별과 같이 빛나는 것.
메세타 평원(Meseta), 카스트로헤리스를 지나 테호(Teso de Mostelares) 언덕을 오르는 길에서 만나는 일출은 영혼의 독백이다. 스페인의 심장부, 부르고스에서 레온으로 이어지는 황금빛 고원지대를 순례자들은 영혼의 사막이라고 부른다. 메세타 평원은 사람이 만든 불빛이 거의 없다. ‘별들의 길(Camino de las Estrellas)'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이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 순례자들은 은하수(Milky Way)가 이끄는 적막한 들판을 걸으며, 자신과 대화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돈키호테의 풍차 같은 그림자를 향해 돌진하는 발소리. 지평선 끝에서 빨갛게 피어나는 태양이 겨울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순간, 나의 안녕과 내 곁을 지켜준 이들의 안녕을 묻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에 모든 것을 마주하는 용기를 낸다.










울퉁불퉁한 돌길에도 그 안에 또 다른 길이 있다. 농부의 트랙터가 밟고 간 길을 따라 순례자의 걸음으로 고르고, 단단해지고, 무뎌진 길. 마을에 들어서면 개 짖는 소리, 나무 타는 냄새가 난다. 성당 첨탑 아래에 모여 사는 사람들, 성당 종소리를 들으며 사는 사람들은 시골 아이들 같은 웃음을 가졌다. 성당 첨탑에서 새들은 세상을 본다. 성당 첨탑에서 새들은 사랑을 한다. 둥지를 틀고, 성당 종소리에 노래하고, 춤을 춘다.










프로미스타에 들어서기 전부터 오른쪽 정강이 쪽에 통증이 있었고, 걸음은 느려졌다. 잠시 멈추면 사라지고, 다시 걸으면 도지는 아픔이다. 바람이 내게 준 선물이다. 통증은 몸의 소리에 집중하게 만든다. 원래 까리온까지 걸으려 했던 계획은 무너졌다. 프로미스타에서 계속 걸을 수 있을지, 멈춰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구글맵에서는 영업 종료였던 시간에 기꺼이 문을 열겠다며 맞아준 El Chiringuito Del Camino, 호세(Jose)와 앤디(Andy) 부부가 순례자에게 내어 준 따뜻한 한 끼의 위로. 그날의 기억을 기록하는 음식. 따뜻한 카스티야 수프와 돼지고기 폭립 그리고 와인과 디저트까지 먹고, 조금 더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까리온까지 가겠다는 섣부른 용기는 점점 방향을 잃고 있었다. 몹시도 바람 불던 날에, 멈춰버린 풍력 발전기처럼 생소하다. 어쩌면 우리가 나아갈 길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인지도 모른다. 순례길에서 시간은 달력이나 시계에 달려있지 않다.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에서 굳게 닫힌 알베르게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다. 체념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을 잡은 것은 회색 수염을 기른 앙겔과 로사 부부였다. 보청기를 끼고 있는 그들에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것부터 기적이었다.










앙겔과 로사는 2006년에 산티아고 순례길, 그라뇽에서 결혼했다. 순례길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처럼 산다. 프랑스에 살다가, 모든 재산을 팔아서 이 집을 샀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순례자를 기다리고, 환대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작년에 자전거로 순례길을 다니면서 찾은 최적의 장소가 Villarmentero de campos 였단다. 앙켈은 21번을, 로사는 17번을 순례길을 걸었다. 내게 원하는 저녁 시간을 묻는 그는 단지 하룻밤을 묵어가는 순례자에게 주도권을 내준 천사처럼 파스타가 들어간 수프와 터키식 오믈렛 그리고 프랑스의 대표적인 치즈 까망베르와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전통 허브 리큐어라는 독주를 내어준다. 자신의 공간이 순례자의 쉼터가 되길 바라는 진심. 사랑은 고통보다 잔혹하고, 석양처럼 붉게 물든다. 오늘을 기억하는 별무리가 되어 아파하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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