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8일 목요일 10일 차 아타푸에르카(Atapuerca)에서 부르고스(Burgos)까지. 날씨 흐리고 안개. 최대 풍속 34km/h
이동 거리 21.45km. 소요 시간 4시간 30분.






쉬운 순례길은 없다. 순례자들은 각자의 간절한 고민과 희망을 품고 길을 걷는다. 걷다 보면 몸과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다. 아프고, 힘들다는 말을 꾸밈없이 마주하게 된다. 길을 걷는,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 나라와 민족, 언어가 다른 순례자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손짓, 발짓, 환한 웃음만으로도 우정이 싹트고, 깊은 연대가 생긴다. 힘들고, 배고프고, 추웠던 순간을 같이 했다는 연민일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서도 친구가 되고, 순례길의 동반자가 된다. 지친 몸을 누일 공간, 따뜻한 한 끼의 식사를 같이 나누는 사이. 한 공간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순례자에게 특별한 경험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알베르게에는 수천, 수만 명의 순례자가 남긴 사연이 쌓인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밤으로 남는 소중한 추억이다.







오늘은 자욱한 안개 때문에 일출은 가려졌다. 부르고스까지 가는 길이 짧아서 고민했는데, 쉬운 순례길은 없다는 까미노의 진리. 칠흑같은 어둠과 차가운 바람 그리고 짙은 안개 속을 걷는다는 건 또 다른 전율이었다. 불빛에 반짝이는 까미노 표지판은 천국의 문처럼 환하게 나를 오라 한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나선다는 것. 거친 돌들이 반겨주는 언덕을 오르고, 짙은 안개와 서리를 맞으며 내 삶을 투영하는 일. 내 삶은 안개 덮힌 오늘처럼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한치 앞도 희미했기에 절망하고, 불안했던 가련한 청춘.









차들도 달리지 않는 새벽, 마주오는 버스 기사가 수줍은 경적 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순간을 기억하는 짧은 손 인사. 안개 낀 새벽에는 마을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거린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봤던 사진들이 풍경으로 직접 가슴으로 멈춰버리는 찰라도 내가 짊어져야 할 고마움의 순간이다. 내 삶에 당연시 여겼던 모든 것이 감사로 바뀌는 기적. 언 몸을 녹이는 카페의 커피 한 잔과 기꺼이 내어준 화장실에서도 온기가 느껴진다. 만약 해드렌턴이 없었다면, 통증을 이겨내는 발바닥도, 땀에 절은 양말 한 짝도, 당연히 입고, 벗던 옷 한 장도 고맙다. 내 삶에 당연했던 것은 없다. 순례길에서는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법을 배운다.
혹 붙이듯 상처를 잔뜩 짊어지고 자라는 나무가 있다. 생명은 위대한 것이다. 부러지고, 썩고. 속이 텅 비어버린 고목에도 가까스로 생명은 붙어있다. 살면서 나는 어떤 상처를 혹처럼 붙이고 살았던 것일까. 떼어내는 고통보다 두려운 것은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상처를 외면하는 일.
칠흑같은 언덕을 넘어서면 부르고스까지 가는 길은 아스팔트를 위를 걸어야 한다. 순례자는 아스팔트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차도 드문드문 다니는 새벽, 아스팔트를 걷다가 마을에 들어섰을 때, 따뜻한 음식을 요리하는 구수한 냄새에 끌려 하마터면 문을 두드릴 뻔 했다. 콧물을 흘리고, 하염없이 걷고, 와인을 음미하고, 따뜻한 음식 냄새에 끌리고, 어느 것 하나 내가 살았던 삶의 모습이 아니기에 산티아고는 내 삶의 돌연변이가 분명한 것 같다. 내가 걷는 이 길은 과연 내 삶을 어떻게 바꾸게 될까.










내가 나아갈 마드리와 레온으로 통하는 도시 부르고스. 몸은 아프다고 아우성인데,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오늘의 나를 안아준 오후처럼 묵묵히 내 삶에 드려졌던 안개를 걷어낸다.
전망대(Mirador Del Castillo)에서 부르고스 대성당의 첨탑과 도시 전경을 본다. 아름다움은 힘듦에 비례한다. 때로는 순례길을 벗어나 지친 발걸음을 더 떼고, 높은 곳에 올라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자꾸만 내게 손짓한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1221년 착공, 300년에 걸쳐 완공했다고 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많은 순례자가 도시나 시골 마을에 머물면서 이런 소중한 자산을 둘러본다. 스페인의 문화와 역사, 자연을 맘껏 즐기는 특별한 경험이다. 여행이 주는 마법 같은 선물이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스페인만의 매력을 한껏 풍기는 아름다운 마을을 지난다. 아파트 빌딩 숲을 벗어나 전통 한옥마을을 걷는 느낌과는 조금 다르다. 인위적으로 만든 민속촌을 방문하는 느낌과도 다른 매력이 있다. 실제 주민이 살고, 사람들이 아침을 먹기 위해 들리는 바(Bar)가 존재하며, 성당 종소리가 울리고, 노수녀님이 손수 만든 목걸이를 걸어주고, 축복을 빌어주는 작은 마을들이 있다.










부르고스에 도착했을 때, 까미노를 마치고 보석처럼 간직했던 반지를 잃어버린 분의 울트레이아 반지를 구입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에게 신부이며, 은사인 분에 대한 소중한 마음이 느껴져서 약속을 지키려 한다. 그리고 첫째와 나이가 같은 네덜란드 순례자, 로젠은 오늘 부르고스에서 그녀의 두 번째 순례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스물 여덟시간을 넘게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축복 있으라.
스페인의 성당은 들어가는 문과 나가는 문이 다르다. 사람은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똑같아야 한다. 별 4개짜리 호텔 옆에 초라한 알베르게가 있다.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순례길에서 만난 최상의 알베르게이다. 사람 사는 것은 같을 것이다. 복권방 앞에 모여 있던 스페인 사람들처럼 나는 오늘도 헛된 희망을 품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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